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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한겨레21> 법 밖의 '그림자 노동' 조회수 2014-11-16

법 밖의 ‘그림자 노동’

등록 : 2014.11.13 15:33 수정 : 2014.11.13 15:38

농업 이주노동자가 수확한 채소를 정리하고 있다. 비닐하우스 밖에 서 있는 노동자의 뒷모습을 안에서 찍었다. 김정용 제공


[특별기획_인권밥상] ④ 법이 외면한 농업
노동 법 안에서 ‘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규정은 ‘없음’
그들이 처한 노동 현실 파악 안 되고 현실과 유리된 법은 ‘고통의 산실’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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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권리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리 없다.

 

한국 농업은 그림자의 영역이다. 국가 정책에서 밀려난 농업은 법의 세계에서도 ‘관심 밖의 영토’다. 한국의 법체계는 농업 분야에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있음’(存在)을 증명받지 못하는 자는 ‘없음’에 속한다. 농업노동자가 보이지 않으므로 농업노동을 지탱하는 이주노동자도 투명인간이다.

 

한국 법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농업과 농업 이주노동자의 ‘법적 처지’는 고용노동부가 국제노동기구(ILO)에 제출한 ‘미비준 협약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ILO는 현재 ‘농업노동자 결사의 자유 협약’(11호·1921년 제정)과 ‘농촌노동자 조직 협약’(141호·1975년 제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제정 이후 변화된 농업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다. 두 협약은 각각 90여 년(1921년)과 40여 년(1975년) 전에 만들어졌다. ILO는 지난해 전세계 회원국 정부에 농업(촌)노동자들의 현실을 묻는 질의서를 보냈다. 국제 기준과 각국 법·제도의 충돌을 파악해 반영하려는 조처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초 사용자(한국경영자총협회)와 노동자(민주노총·한국노총) 단체에 답변 내용을 회람한 뒤 ILO에 보냈다. 양대 노총은 이주민과함께, 국제식품노련(IUF),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등과 정부 보고서의 문제점을 분석해 별도 의견서를 작성했다.

 

“농촌근로자의 범주를 따로 규정하는 법령은 없다.”

 

ILO 질의(“귀 국가의 농촌노동자의 범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농촌노동자들의 조직 설립을 규정하는 법률 및 행정적 규제 조항을 제공하라”)에 대한 정부의 대답이다. 국내 농업(촌)노동자들은 법의 언어로 정의되지 못하는 존재다.

 

ILO는 농업 분야 노동자를 두 가지 개념으로 풀이한다. 농‘업’노동자(Agricultural Worker·11호 협약에 해당)는 농업 쪽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를 뜻한다. 농‘촌’노동자(Rural Worker·141호 협약에 해당)는 농촌의 임금노동자뿐 아니라 차지인(借地人)과 소작농 및 소규모 자작농을 포함한다. 두 개념 모두 한국 법엔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 부재’ 상황에서 정부는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안전 기본법’과 시행령이 규정하는 ‘농업인’의 정의를 끌어와 설명을 대신했다. △1천m² 이상의 농지를 경영하거나 경작하는 사람 △농업경영을 통한 농산물의 연간 판매액이 120만원 이상인 사람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영농조합법인의 농산물 출하·유통·가공·수출 활동에 1년 이상 계속하여 고용된 사람 △농업회사법인의 농산물 유통·가공·판매 활동에 1년 이상 계속하여 고용된 사람.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개념이 혼재돼 있다. 피고용인이 누구인지도 뜯어봐야 한다. 논밭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는 일용노동 등 단기고용이 다수다. “1년 이상 계속하여 고용된” 경우는 드물다. 한국 농업(촌)노동자들도 ‘농업인’이기 어렵다는 얘기다. 노동자를 설명하려 동원한 개념이 오히려 노동자를 밀어내는 형국이다. 현실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법 언어’의 힘이다.

 

ILO의 정의와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ILO 141호 협약이 규정하는 농촌노동자는 그 범위에서 고용인(“노동자를 상시 고용하는 자”와 “상당한 수의 계절노동자를 고용하는 자” 또는 “소작농이나 차지인이 경작하는 토지를 소유하는 자”)을 명확하게 제외한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만 집계

 

‘농민’과 ‘농업인’은 직업이지만 ‘노동자’ 혹은 ‘근로자’는 지위다. 한국의 농업 관련 법엔 고용인에 가까운 ‘농업인’만 있을 뿐 법으로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농업(촌)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권리를 다루는 규정도 없다. ILO는 한국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를 묻는데 기준이 되는 법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

 

농업(촌)노동자의 정확한 통계도 알 수 없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매달 실시)는 농업 종사자 수는 제시하지만 그들이 고용인인지, 자영농인지, 피고용인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농림어업총조사(5년 단위)도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는 집계하되 노동자 수는 파악하지 않는다. “농촌노동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정부가 ILO에 제출한 보고서는 그들이 처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양대 노총 의견서는 평했다.

 

그래서다. 정부 보고서에선 농업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농업(촌)노동자가 파악되지 않는 법 시스템에선 농업노동을 지탱하는 이주노동자들도 미확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정부 보고서는 농업(촌)노동자를 한국인으로만 상정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장기 임금노동자의 다수(2014년 8월 법무부 집계는 2만3996명이나 미등록 노동자 등을 포함하면 2만5천 명 이상 추정)를 이주노동자가 채우고 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다.”(정옥순 IUF 한국지부 사무국장)

 

비판엔 이유가 있다. 정부가 “농업인들은 민법 등을 바탕으로 농민단체를 자유롭게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복지 등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때 “농업인들”에 이주노동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분야별로 다양한 육성 및 지원 관련 법령이 있으며 소득 안정을 위한 보조금 지급·농업인단체 등의 교육 운영 지원 등”을 받는 “농업인(혹은 농업경영체)”도 한국인과 고용주에게만 해당되는 설명이다.

 

국내 농업노동자의 결사 및 농촌노동자 조직의 자유를 묻는 ILO의 질문에 정부는 “법적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용노동부는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헌법 제33조 제1항)며 “농업에 종사하는 임금근로자들은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임금근로자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현실과는 괴리가 크다. 정부가 ‘농업 임금근로자들’의 범주에 이주노동자까지 포함시켰다면 사실과 다른 허위 보고서를 썼다는 의미가 된다.

 

노조가 없는 이주노동자들

 

법규상으로는 이주노동자 역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적용을 받지만 현재 정부는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주노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5년 5월 노동부는 이주노조의 설립신고를 반려했다. 조합원에 미등록 노동자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였다. 이주노조는 법원에 설립신고 반려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1심(노동부 승소)과 2심(이주노조 승소)을 거쳐 노동부의 상고(2007년 2월)를 접수한 대법원은 7년이 넘는 지금까지 판결을 미루고 있다. 윤지영 공감 변호사는 “현실적 탄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법규상 제한이 없다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인이든 이주노동자든 농업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한 노동조합은 현재 전무하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과도한 노동(제1033호 표지이야기)과 계약위반(제1034호 특별기획 ‘약속을 배반하는 비정한 계약들’ 참조) 등을 이유로 단체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그는 강원도 춘천의 한 파프리카 농장주의 말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같은 국적으로 2~3명 썼다. 그랬더니 같이 데모하더라. 그래서 이번에는 네팔 1명, 미얀마 2명을 신청했다. 다른 국적을 써야 데모 안 할 거 같아서다. 데모를 하면 골치 아프니까 데모 주동자는 아예 우리가 (본국으로) 보내버린다.”

 

정부 보고서는 실제와 어긋남의 연속이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입국 뒤 2박3일간 교육을 받는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문제제기 방법을 교육받는 대신 고용주에게 불만이 있어도 참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침’(국가인권위 보고서) 받는다.

 

ILO 11호 협약(“농업에 종사하는 모든 자에 대하여 공업근로자에 대한 것과 동일한 결사 및 조합의 권리를 확보하고, 그러한 권리를 제한하는 모든 법률 기타의 규정을 폐지할 것을 약속한다”)은 1921년에 제정됐다. 100년을 채워가는 협약조차 한국에선 요원하다는 증거들이다. “ILO의 11호·141호 협약 개정은 너무 오래돼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현실에 맞도록 바꾸려는 작업이다. 고용허가제로 농업 이주노동자가 대거 유입되고 있는 한국에선 93년 전 협약 내용조차 부러울 지경이다.”(정옥순 사무국장)

 

정부의 답변을 보면 농업 현장의 변화를 법·제도에 반영하겠다는 뜻도 없어 보인다. 양대 노총은 한국 정부가 농업(촌)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법화에 나서도록 ILO가 힘써줄 것을 촉구했다. ILO도 농업(촌)노동자 결사의 자유를 위해 정책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느냐고 정부에 물었다. 고용노동부는 “없다”고 답했다. 향후 정책 조언과 기술협력이 필요하냐는 질문엔 “필요시 요청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ILO에 제안할 내용을 묻는 질의에도 정부의 답은 “없음”이었다.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한국의 법률과 관행을 수정한 적도 “현재로서는 없다”고 답했다. 한국 농업은 정부의 산업정책에서뿐 아니라 의지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

 

농업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법체계

 

이 ‘사태’는 단순히 ‘법의 지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과 유리된 법은 ‘법치의 근거’가 아니라 ‘고통의 산실’이 된다. 소농이 몰락하는 한국의 농업은 규모를 키운 기업농의 형태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가족이 중심이었던 농업노동력도 근대적 임금노동 형태로 재편되고 있다. ‘광의의 농업인’이 아니라 ‘협의의 노동자’ 없이는 농사가 불가능해졌다. 격랑에 올라탄 농업의 변화를 법체계가 반영하지 못할 때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농업은 ‘두 번 죽을’ 수도 있다.

 

양대 노총의 의견서는 지난 10월20일 ‘인권밥상’ 캠페인(<한겨레21>과 국제앰네스티 등 8개 단체 공동 진행)의 시작에 맞춰 ILO로 발송됐다. ILO 전문가위원회는 2015년 2월 각국 정부의 답변서와 노사 의견서를 종합해 6월 총회에 보고서를 올린다. 총회에 제출된 보고서는 기준적용위원회가 검토해 11호·141호의 협약 개정 여부를 결정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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