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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우리가 사는 세상> 나의 결혼과 출산 이야기 by 장려홍 조회수 2015-09-23
나의 결혼과 출산 이야기


나는 1995년 3월쯤,  중국 신천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회계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중국은 처음 개방정책을 펼쳤고, 한국 회사들이 많이 들어왔다.

8월 12일에 한국 기술자가 회사에 새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피부가 하얗고 뚱뚱한 아저씨였다. 중국말은 한마디도 못했었다.

내가 회계담당이어서 기숙사와 생활용품 준비를 했었다. 사실 나는 사무실에 있고 그 아저씨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일은 없었지만, 내가 생활담당을 했었기 때문에 통역아가씨와 함께 만나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때 나는 예쁜 아가씨였다.  회사 사장님이 그 아저씨한테 내가 일도 열심히 하고 똑똑하다고 말해서, 아저씨가 관심을 갖었던 거 같다. 하지만 우리가 말이 전혀 안통해서 아저씨는 통역아가씨를 불러서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꼭 통역 아가씨가 있어야 말이 통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심심하게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내가 이제 같이 안마나겠다고 선언했다. 아저씨는 그럼 통역을 통하지 말자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언어가 안통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2층, 아저씨는 1층에 있었다. 아저씨는 1층에서 내 목소리가 듣고싶다고 2층에 전화했는데, 다른 사람이 받으면 잘못걸은 척 전화를 끊고, 내가 받으면 통화를 했다. 그것때문에 나중에 욕을 많이 들었다. 아저씨는 "시간 있냐", "어디서 만나냐" 이런 단순한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연애를 했다. 먹을 메뉴를 정하는 것도 내가 정했는데, 혹시 입맛이 서로 안맞을까봐 2~3개를 시켜서 먹었다. 아저씨는 술을 마시면 없던 말수가 생겨서 말이 많아졌다. 나는 아저씨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나에게 하는 말을 추측했다. 그렇게 한두달을 하다보니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22살, 아저씨가 32살이었다.

아저씨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엄마한테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엄청나게 반대를 했다. 엄마는 아저씨의 가정환경도 모르고, 한국사람이고, 나이차이도 많이 나니까 가지 말라고 했다. 그 때 회사 사장님이 어머니를 만나서 자기가 담보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당시에 중국에서 홍콩사람들이 가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애인을 만드는 경우들이 사회 문제가 되었기때문에 엄가다 더욱 걱정을 하였다. 그 때에 나는 콩깍지가 씌워져 있어서 아저씨 아니면 결혼을 안할거라고 우겼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결혼을 했다.

그 때는 국제결혼이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결혼하는데만 1년이 걸렸다. 공증서도 많이 필요했고, 영사관이 큰 중국 땅덩어리에 2~3개밖에 없는데 결혼관련 처리는 북경 영사관에서만 해줬다. 우리 동네에서 비행기로 4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었다. 미혼공증서, 재산공증서, 직장 공증서, 국적 공증서, 우리가 만난 경위, 증인 2명 등 수많은 서류를 만들어서 심사를 받았다. 이제 남편이 된 아저씨가 얘기했다. "우리는 결혼하는게 너무 어려웠으니까 이혼하지 말자. 계속 같이 살자" 그렇게 결혼을 했고 딸을 나았다.

그런데 남편이 아이 하나는 너무 심심해보인다고 했다. 그 때 딸은 중국 국적이었다. 당시는 2000년도 쯤이었고 중국은 한자녀정책을 강하게 시행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준성증'이라는 것을 들고 다녀야 했다. 준성증이 없으면 이제 곧 나올 아이도 떼게 만들었다. 그 때 눈물 흘려야 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하나 더 낳기 위해서는 한국으로 가야 했고, 아들은 한국 국적이 되어야 했다. 한국에 아이를 나으러 가기 며칠 전에 중국 공안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둘째이기 때문에 나는 '준성증'이 없었고, 공안에서는 나를 억류했다. 아저씨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우리 결혼증, 여권, 비행기 티켓을 부랴부랴 증명했다. 보증금도 몇백만원 내라고 했다. 회사 사장이 보증을 서줬다. 남편이 우는 것을 그 때 처음 봤다.  

그렇게 한국에서 아이를 겨우 낳고 다시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갔을 때도 종종 왜 아이가 둘이냐며 공안이 찾아왔다. 딸은 중국국적이고, 아들은 한국국적인걸 보여줘야 알았다고 돌아갔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다가 2006년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험난한 결혼과 출산이었다.

글 = 2015.5.10 장려홍
편집 = 한국이주인권센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주민이 본국과 한국에서 겪는 일상을 본인들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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